"배고팠지만 행복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얼굴들
우즈베키스탄 아리랑요양원에서 만난 고려인들
지난 8월 31일 부터 9월 15일까지 고려인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을 여행하며 고려인의 삶을 공부했습니다. 이 기사는 현장에서 만난 고려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어린 시절의 우리는 참 행복했어요."
뜻밖의 말이었다. 1937년 강제이주, 화물열차, 황무지, 굶주림. 한국에서 고려인의 역사를 공부하며 우리가 먼저 만난 것은 대부분 고통과 수난의 언어였다.
그런데 지난 9월 3일 우즈베키스탄 아리랑요양원에서 만난 한 고려인 어르신은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다가 "그래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동백작은학교 학생 서로는 그날의 소감 나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배고팠던 그 시절도 행복했다는 이야기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내 안에 있던 관념을 많이 바꿔주었어요."
우리가 중앙아시아까지 온 이유도 어쩌면 이런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한국사를 한반도 밖에서 만나다
이번 공정여행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고려인의 역사와 독립운동의 흔적을 직접 만나는 일이었다.
우리는 종종 한국사를 한반도 안의 역사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국경을 넘어 이동했고,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역시 수많은 한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삶과 역사를 이어간 공간이었다.
1937년 소련 당국은 극동 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사람들은 충분한 준비도 없이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고, 긴 이동과 정착 과정에서 굶주림과 질병, 죽음을 겪었다.
우리가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 강제이주의 역사를 지나 중앙아시아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삶이었다.
아리랑을 부르자 노래가 돌아왔다아리랑요양원은 고려인 어르신들의 건강과 존엄한 노후를 위해 설립된 공간이다. 지난해 개원 15주년을 맞았고, 현재 39명의 어르신이 생활하고 있었다.
양희만 원장은 동백이들을 반갑게 맞으며 요양원의 역사와 고려인의 삶을 자세히 들려줬다. 동백이들이 풍물을 연주하자 어르신들은 손뼉을 치며 몸을 흔들었다. '아리랑'을 부르니 여기저기서 노랫소리가 더해졌다. 고려인을 위한 노래 '망향가'를 부를 때는 우즈베키스탄 직원들까지 함께 따라 불렀다.
공연을 마치려던 순간 이번에는 어르신들의 답가가 시작됐다.
▲고려인 어르신들을 위한 동백학생들의 풍물 공연 ⓒ 이임주관련사진보기
한 분이 노래를 부르면 또 한 분이 손을 들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노래가 이어졌다. 그러다 한 어르신이 '곰 세 마리'를 불렀다. 동백작은학교 학생은 요양원을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아주 어릴 적에 배운 노래와 율동을 기억하고 계신 걸 보니 눈물이 났어요. 그때의 기억이 얼마나 소중했으면 지금까지 잊지 않고 계실까. 만남의 순간순간 그분들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어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어르신들도 많았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며 언어는 달라졌지만 어린 시절 배운 노래는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책에서 배웠던 고려인의 역사가 한 사람의 삶과 기억 속에 이어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난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동백학생들의 질문도 이어졌다.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 물었다. 한 어르신은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시절과, 자식들만큼은 행복하게 키우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면서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어린 시절의 우리는 행복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고려인의 삶을 바라보던 시선을 바꾸었던 짧지만 긴 여운의 문장이었다. 강제이주는 분명한 국가폭력이었다. 그 참혹함을 흐리거나 낭만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해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과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피해와 불행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 혹독한 시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의지했고, 사랑했고, 노래했고, 아이를 키웠다. 척박한 땅에 농사를 짓고 마을을 만들며 다시 삶을 일궜다. 그들은 국가폭력의 피해자였지만, 피해자로만 살아간 사람들은 아니었다.
▲고려인 어른신들을 위한 공연_ '아리랑'과 '망향가'를 부르고 있다. ⓒ 이임주관련사진보기
아리랑요양원을 나와 황만금 박물관으로 향했다. 황만금 선생의 조카 황울리아씨가 직접 당시의 역사를 들려줬다.
강제이주 당시 열차 안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러시아어를 알지 못했던 고려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당시 19살이었던 황만금 선생은 러시아어를 할 수 있어 통역을 하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도착한 곳은 사람이 살기 힘든 황무지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시 집을 짓고 농사를 시작했다. 벼와 목화, 옥수수와 밀을 심고 집단농장을 일궜다.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배운 이들이 다시 공동체로 돌아와 마을을 더 나아지게 하도록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단농장은 세계적으로도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마을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 기적의 기록들을 사진으로 하나하나 둘러 볼 수 있었다.
황울리아씨가 들려준 황만금 선생의 말이 오래 남았다.
"당신들은 우리를 죽으라고 보냈지만, 우리는 살아 있다."
죽으라고 버려진 땅에서 살아남는 것. 그것도 단지 목숨을 이어가는 데 그치지 않고 농사를 짓고, 마을을 만들고, 아이들을 공부시키며 공동체의 미래를 만들어간 것.
고려인의 역사는 쫓겨난 역사이면서 동시에 끝끝내 삶을 다시 만들어낸 사람들의 역사였다. 우리가 직접 만난 고려인들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희망으로 이어져 결국 뿌리를 내리고 한국인의 문화를 이어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황만금선생의 조카 황울리아님께서 고려인 공동체가 일구었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 이임주관련사진보기
우리가 기억하고 이어가야 할 역사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고려인의 역사와 삶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을 여러 사람에게 물었다. 그때마다 "요즘은 예전 같은 고려인 공동체를 찾기 쉽지 않다", "강제이주 이야기를 직접 들려줄 분들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 여행을 기획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잊혀져 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어르신들 가운데 1937년 강제이주를 직접 기억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8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몇 세대가 지나며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고려인도 많아졌다. 그러나 언어와 삶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 역사의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연해주는 우리 독립운동의 중요한 무대였고, 고려인의 삶은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와도 깊이 이어져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우리는 고려인의 삶뿐 아니라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이 역사는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소중히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이어가야 할 역사다.
강제이주의 고통뿐 아니라, 낯선 땅에서 다시 삶을 일구고 아이들을 키우며 공동체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함께 기억해야 한다. 어르신들이 답가로 불러 주셨던 '아리랑'과 '곰 세 마리', 손을 맞잡았을 때의 온기, "배고팠지만 행복했다"는 말은 책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살아있는 기억의 역사였다.
우리가 만난 것은 과거의 사건 만이 아니었다. 그 시간을 지나 살아온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였고, 우리가 앞으로도 소중히 이어가야 할 역사였다.
▲동백학생들이 직접 만든 현수막을 들고 아리랑 요양원 앞에서 ⓒ 이임주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동백작은학교는 제주에 위치하고 있으며 생태, 인권, 평화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청소년 민주시민 교육 공동체이다. 제주 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14세~19세의 청소년들이 함께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배우고 실천하며 따뜻한 공동체를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평등한 통합교육을 지향하고 있으며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배움이 즐거운 '학교를 넘어선 ' 배움의 공동체를 꿈꾸는 곳이다. 2021년 3월에 처음 문을 열었으며, 전국에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https://www.dongbaekschool.com/
"배고팠지만 행복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얼굴들
우즈베키스탄 아리랑요양원에서 만난 고려인들
뜻밖의 말이었다. 1937년 강제이주, 화물열차, 황무지, 굶주림. 한국에서 고려인의 역사를 공부하며 우리가 먼저 만난 것은 대부분 고통과 수난의 언어였다.
그런데 지난 9월 3일 우즈베키스탄 아리랑요양원에서 만난 한 고려인 어르신은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다가 "그래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동백작은학교 학생 서로는 그날의 소감 나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중앙아시아까지 온 이유도 어쩌면 이런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한국사를 한반도 밖에서 만나다
이번 공정여행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고려인의 역사와 독립운동의 흔적을 직접 만나는 일이었다.
우리는 종종 한국사를 한반도 안의 역사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국경을 넘어 이동했고,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역시 수많은 한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삶과 역사를 이어간 공간이었다.
1937년 소련 당국은 극동 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사람들은 충분한 준비도 없이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고, 긴 이동과 정착 과정에서 굶주림과 질병, 죽음을 겪었다.
우리가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 강제이주의 역사를 지나 중앙아시아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삶이었다.
아리랑을 부르자 노래가 돌아왔다
아리랑요양원은 고려인 어르신들의 건강과 존엄한 노후를 위해 설립된 공간이다. 지난해 개원 15주년을 맞았고, 현재 39명의 어르신이 생활하고 있었다.
양희만 원장은 동백이들을 반갑게 맞으며 요양원의 역사와 고려인의 삶을 자세히 들려줬다. 동백이들이 풍물을 연주하자 어르신들은 손뼉을 치며 몸을 흔들었다. '아리랑'을 부르니 여기저기서 노랫소리가 더해졌다. 고려인을 위한 노래 '망향가'를 부를 때는 우즈베키스탄 직원들까지 함께 따라 불렀다.
공연을 마치려던 순간 이번에는 어르신들의 답가가 시작됐다.
"아주 어릴 적에 배운 노래와 율동을 기억하고 계신 걸 보니 눈물이 났어요. 그때의 기억이 얼마나 소중했으면 지금까지 잊지 않고 계실까. 만남의 순간순간 그분들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어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어르신들도 많았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며 언어는 달라졌지만 어린 시절 배운 노래는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책에서 배웠던 고려인의 역사가 한 사람의 삶과 기억 속에 이어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난만으로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동백학생들의 질문도 이어졌다.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 물었다. 한 어르신은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시절과, 자식들만큼은 행복하게 키우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면서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어린 시절의 우리는 행복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고려인의 삶을 바라보던 시선을 바꾸었던 짧지만 긴 여운의 문장이었다. 강제이주는 분명한 국가폭력이었다. 그 참혹함을 흐리거나 낭만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해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과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피해와 불행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 혹독한 시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의지했고, 사랑했고, 노래했고, 아이를 키웠다. 척박한 땅에 농사를 짓고 마을을 만들며 다시 삶을 일궜다. 그들은 국가폭력의 피해자였지만, 피해자로만 살아간 사람들은 아니었다.
강제이주 당시 열차 안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러시아어를 알지 못했던 고려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당시 19살이었던 황만금 선생은 러시아어를 할 수 있어 통역을 하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도착한 곳은 사람이 살기 힘든 황무지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시 집을 짓고 농사를 시작했다. 벼와 목화, 옥수수와 밀을 심고 집단농장을 일궜다.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배운 이들이 다시 공동체로 돌아와 마을을 더 나아지게 하도록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단농장은 세계적으로도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마을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 기적의 기록들을 사진으로 하나하나 둘러 볼 수 있었다.
황울리아씨가 들려준 황만금 선생의 말이 오래 남았다.
죽으라고 버려진 땅에서 살아남는 것. 그것도 단지 목숨을 이어가는 데 그치지 않고 농사를 짓고, 마을을 만들고, 아이들을 공부시키며 공동체의 미래를 만들어간 것.
고려인의 역사는 쫓겨난 역사이면서 동시에 끝끝내 삶을 다시 만들어낸 사람들의 역사였다. 우리가 직접 만난 고려인들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희망으로 이어져 결국 뿌리를 내리고 한국인의 문화를 이어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고려인의 역사와 삶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을 여러 사람에게 물었다. 그때마다 "요즘은 예전 같은 고려인 공동체를 찾기 쉽지 않다", "강제이주 이야기를 직접 들려줄 분들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 여행을 기획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잊혀져 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어르신들 가운데 1937년 강제이주를 직접 기억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8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몇 세대가 지나며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고려인도 많아졌다. 그러나 언어와 삶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 역사의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연해주는 우리 독립운동의 중요한 무대였고, 고려인의 삶은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와도 깊이 이어져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우리는 고려인의 삶뿐 아니라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이 역사는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소중히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이어가야 할 역사다.
강제이주의 고통뿐 아니라, 낯선 땅에서 다시 삶을 일구고 아이들을 키우며 공동체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함께 기억해야 한다. 어르신들이 답가로 불러 주셨던 '아리랑'과 '곰 세 마리', 손을 맞잡았을 때의 온기, "배고팠지만 행복했다"는 말은 책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살아있는 기억의 역사였다.
우리가 만난 것은 과거의 사건 만이 아니었다. 그 시간을 지나 살아온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였고, 우리가 앞으로도 소중히 이어가야 할 역사였다.
덧붙이는 글 | 동백작은학교는 제주에 위치하고 있으며 생태, 인권, 평화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청소년 민주시민 교육 공동체이다. 제주 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14세~19세의 청소년들이 함께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배우고 실천하며 따뜻한 공동체를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평등한 통합교육을 지향하고 있으며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배움이 즐거운 '학교를 넘어선 ' 배움의 공동체를 꿈꾸는 곳이다. 2021년 3월에 처음 문을 열었으며, 전국에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https://www.dongbaekschool.com/